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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견기업 특별법' 상시법 전환, 새로운 시작이다


 

일명 '중견기업법', 정확히는 '중견기업 성장 촉진 및 경쟁력 강화에 관한 특별법'이 상시법으로 전환됐다. 이 법은 2014년 제정돼 10년의 한시법으로 존재했다. 2024년 7월 이 법의 실효기간이 만료될 예정이었지만 다행히도 상시법으로 전환됐다. 정말 환영할만한 일이다. 

 

상시법 전환을 환영하는 이유는 중견기업이 갖는 특수한 위치 때문이다. 한국은 산업적으로 허리 기업이 약한 나라다. 9988이라는 말이 있다. 99%의 중소기업이 88%의 고용을 책임지고 있다는 뜻이 담겨 있다.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한국이 얼마나 중소기업에 고용을 의존하고 있는지 잘 나타내고 있다. 매출은 어떨까? 상당 부분을 대기업에 의존하고 있다. 2020년 기준 한국 100대 기업의 비중은 총매출 대비 45.6%였다. 30대 기업이 차지하는 비중도 31.1%였다. 무엇을 말해주는가? 한국경제는 고용은 중소기업에, 매출은 대기업에 의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수치들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더욱 벌어진다. 중소기업에의 고용 의존은 더욱 심화되고 대기업에의 매출 의존 역시 더욱 높아진다. 매출의 경우 2011년 기준 100대 기업 비중은 58.1%였고, 30대 기업의 경우는 42.1%에 달했다. 

 

이 수치들은 한국에게 시급하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 전체 기업의 99%를 차지하고 있는 중소기업들을 빨리 성장시키라는 요구가 첫 번째다. 이들이 고용의 대부분을 책임지고 있지만, 이대로 방치하면 한국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어서다. 중소기업은 아무래도 인건비 등 고용 여건이 상대적으로 열악하다. 최근의 추세라면 MZ세대는 이 기업들을 외면할 가능성이 높아, 중소기업들은 외국인들에게 더 많은 의존을 하게 될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9988은 한국인을 위한 수치가 아닌 외국인을 위한 수치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만큼 경쟁력 약화가 눈에 보인다. 이것을 벗어나려면 중소기업을 빨리 성장시킬 필요가 있다. 중견기업으로의 성장이 일차 목표다. 

 

다른 요구도 하고 있다. 경쟁력이 강한 기업들을 더 많이 만들라는 것이다. 한국 경제의 최상단에는 1960~70년대를 주름 잡았던 기업들이 아직도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이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세대 교체가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이 불안한 것이다. 축구에 비유하자면 한국 경제는 손흥민, 이강인, 김민재와 같은 걸출한 스타를 배출하지 못하고, 차범근, 박지성, 이영표 선수에게 의존하고 있는 모양새다. 경쟁력 강한 새로운 스타 기업들이 등장하기 위해서는 중소기업이 중견기업,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자연스러운 경로가 열려 있어야 한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중견기업이 중간 기착지가 되어야 한다. 이번 상시법 전환 개정에 중견기업을 경로로 인정하는 분위기가 있었다고 한다. 

 

중견기업 지원의 법적 근거가 사라질 경우 중소기업이 중견기업으로 성장하고, 중견기업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업 생태계 구축이 어려워질 것을 우려해 상시법 전환 개정을 했다는 것이다. 2014년 '중견기업 특별법' 제정 당시 중견기업이 왜 필요하냐는 갑론을박이 있었다. 이제는 그 필요성을 공감하는 분위기가 느껴진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중견기업이 한국경제에서 차지하는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대기업의 매출집중도 추세에서 읽을 수 있다. 앞서 소개한 대로 2011년 기준 100대 기업의 매출집중도는 58.1%였는데 2020년에는 45.6%로 12.5%나 감소했다. 30대 기업을 기준으로 봐도 이 기간 중 11.0%가 줄었다. 한국경제의 대기업 의존도가 준 것이다. 중견기업의 약진이 한 원인이다. 한국의 중견기업은 그 수가 매우 적다. 그래서 산업통상자원부의 큰 목표 중 하나가 중견기업 수 늘리기일 정도다. 한국 전체 기업 수 대비 2%가 채 안 된다. '중견기업 특별법'이 시행되기 이전인 2013년 전체 중견기업 수는 3,846개에 불과했다. 2021년에는 그 수가 5,480개로 늘었다. '중견기업 특별법' 때문이라고만은 할 수 없지만, 이 법을 계기로 정부, 정치권 그리고 기업들의 중견기업에 대한 인식 변화가 있었고, 이들의 노력이 묻어난 결과로 보아야 한다. 

 

매출에서도 큰 변화가 있었다. 2013년 기준 중견기업의 매출은 629.4조 원에서 2021년에는 852.7조 원으로 늘어났다. 고용은 116.1만 명에서 159.4만 명으로 늘었고, 수출은 876.9억 달러에서 1,109억 달러로 증가했다. 매출만 따져보면 2013년 대비 26.2%가 증가했다. 이 수치가 반영돼 대기업의 매출 비중이 줄어든 것이다. 한국이 드디어 대기업에 의존하는 경제를 탈피하기 시작했음을 시사한다.

 

중견기업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사회는 중견기업을 잘 모른다. 한국 대부분의 유수 제약회사들이 중견기업이다. 이들이 있어 이 나라의 의료 체계의 한 축이 움직이지만, 사회는 이들이 중견기업임을 모른다. 세계적 명품 가방을 제조·공급하는 회사가 한국의 중견기업이라는 사실도 모른다. 시몬느라는 회사는 코치, 버버리, 토리버치, 마크 제이콥스, 마이클 코어스와 같은 글로벌 명품 가방을 제작·공급하는 기업이다. 세계 명품 핸드백 시장의 10%가 이 회사 제품이고, 미국 명품 가방의 30%를 이 회사가 공급한다. 하지만 이 회사가 한국의 중견기업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2018년 일본이 한국에 반도체 관련 소재 수출 금지를 했을 때 이것을 극복하게 만든 일등 공신이 한국의 중견기업임을 모른다. 그리고 중견기업이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통로임을 아는 사람들도 드물다. 많은 MZ세대들이 네이버에 취업하고 싶어 한다. 이 기업은 대기업이지만 얼마 전까지 중견기업이었다. 하림 닭으로 알려진 하림그룹도 얼마 전까지 중견기업이었다가 대기업이 된 곳이다.

 

이런 기업들이 중견기업이거나 중견기업이었음을 모른다고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중견기업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약해지는 것이 문제다. 이로 인한 부작용 중 하나가 중소기업이 중견기업이 되면 각종 지원이 대폭 줄어드는 것을 들 수 있다. 한국 사회는 기업 규모가 커지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성향이 있다. 작은 기업을 도와야지 왜 다 큰 기업을 돕느냐는 시각이 있어서다. 하지만 이 시각은 60~90년대 기억의 잔존 때문이다. 이 시대는 대기업을 육성하기 위해 중소기업을 희생시킨 시기였다. 작은 한국 시장의 파이를 대기업에 몰아주다 보니 이 기업들만 돈을 버는 제로섬 게임이 펼쳐졌다. 당연히 중소기업들이 정당한 몫을 챙기기 어려웠다. 지금도 그러한가? 한국은 글로벌 10대 경제 강국으로 올라섰다. 다시 말해 한국이라는 좁은 시장만으로 현재의 글로벌 경제력을 유지하기 어렵게 됐다는 말이다. 한국의 일인당 GDP는 2023년 7월 기준 3만 3,400달러 수준이다. 글로벌 시장 없이 국내 시장만으로 이 소득이 유지될 수 있을까? 절대 불가능하다. 죽으나 사나 한국은 글로벌로 나가야 현 수준이라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려면 한국 기업들의 글로벌 경쟁력이 세져야 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한국의 대다수 중견기업은 글로벌 기준으로 구멍가게 수준이다. 이들의 경쟁력을 키워도 모자랄 판에 중소기업에서 중견기업으로 규모가 커졌다고 지원을 줄여 경영 의지를 꺾는 것이 좋은 방법일까? 이것을 보면서 어떤 중소기업이 중견기업이 되겠다는 목표를 가지겠는가? 중견기업으로의 성장이 더뎌지는데 어떻게 새로운 스타 대기업들이 탄생할 수 있겠는가? '중견기업 특별법'이 개정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심 중견기업을 신속히 성장시키자는 정신이 개정법에 담겼으면 했지만 아쉬움이 남는다.

 

이번 개정법에는 사회적 책임경영과 지속가능경영(ESG)에 중견기업도 참여해달라는 요청이 담겨 있다. 이 점에 대해 중견기업들도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ESG라는 단어에는 기업이 환경(Environment), 사회(Social), 지배구조(Governance)를 등한시하지 말라는 국제적 요구가 담겨 있다. 한 마디로, 돈 버는 것만 신경 쓰지 말고 환경과 사회를 위한 경영, 그리고 투명한 경영을 해달라는 것이다. 그동안 열악한 상황으로 인해 중견기업들은 줄곧 사회와 국가에 자신들을 지원해 줄 것을 간절히 요청해 왔다. 이제는 중견기업들이 국가와 사회의 요구에 답해야 하는 시대가 왔음을 개정법이 말해주고 있다. 여기에 더해 국가생존을 위한 노력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한국은 저출산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결혼한 부부가 출산을 꺼리는 이유가 여럿 있지만, 기업이 육아와 출산 지원에 미온적 태도를 보이는 것도 큰 이유라고 한다. 한국 기업들의 성장에 구성원들의 헌신적 노력이 큰 역할을 했다. 이제 기업들이 구성원들을 도울 차례다. 인구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중견기업에 공급할 인력조차 부족해지는 시대가 온다. 이렇게 되면 국가, 국민, 기업이 공멸한다. 중견기업 자신을 위해서라도 인구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당부하고 싶은 말이 하나 더 있다. 피터팬 증후군에서 벗어나 달라는 것이다. 중견기업이 되면 제도적 지원이 확 줄어드는 것이 사실이다. 국민도 정치권도 중견기업을 다 큰 대기업 취급하다보니 일어난 일이다. 그렇다고 혜택 많은 중소기업 시절로 돌아가자는 생각은 제발 접어주길 바란다. 언제 한국의 기업들이 편편하게 성장했던 시절이 있었던가? 힘든 풍파를 경험하고 이것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오늘이 존재한 것 아닌가? 아무리 어려워도 절대 기업가정신의 끈을 놓지 않기를 부탁한다. 사회가 중견기업의 중요성을 잘 모른다고 해도 그 소중함을 알고 마음으로 지원하는 또 다른 사람들도 있음을 꼭 기억해 주기 바란다.

 

'중견기업 특별법'이 상시법으로 전환됐다. 이것의 진정한 의미는 새로운 시작의 선언이다. 중견기업 앞에는 높은 파도가 일고 있다. 이 파도는 서핑을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다. 중견기업의 목숨줄을 노리고 있다. 전기차로 인해 내연기관 자동차 부품의 상당수가 사라질 예정이다. AI로 대변되는 세상이 오면서 새로운 경영 방식이 필요하다. 그동안 가성비 전략으로 잘 살아왔지만 이제는 초격차 전략을 펼쳐야 한다. 가성비만 계속 집착하면 중국기업들의 추격에 언제 당할지 모른다. 해결해야 할 일이 산더미다. 하지만 한국이 잘하는 것이 하나 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능력이다. 이것의 핵심은 하늘을 쳐다보며 원망하는 것에 있지 않다. 자신을 돌아보는 힘에 있다. '중견기업 특별법' 개정을 기점으로 자신을 돌아보자.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중견기업이라는 소중한 국가 자산을 키우고 있다는 자부심도 가져 주기 바란다.